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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세웅 인터뷰] 6월항쟁, 일부 정치인 아닌 이름없는 국민의 승리
     2007-06-14 10:13:04 , 조회 : 3,345 , 추천 : 744





내일신문 | 기사입력 2007-06-13 17:27  

<<양김씨 분열로 과거청산 못해 … 공동체 위해 이웃을 배려하는 삶 필요>>


함세웅 신부는 줄곧 시대의 요구에 응답해 왔다. 70년대 유신헌법과 긴급조치의 폭압 아래서도 그랬고 80년대 뜨거웠던 항쟁의 기운 속에서도 그랬다. 함 신부는 지금도 부름에 응답하고자 한다. 그는 “부름에 응답하는 게 신앙인으로서 당연한 일”이라고 말하지만 그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6월 항쟁의 촉매자로서 그리고 항쟁의 중심에서 역사를 지켰던 함 신부는 “이름없는 주인공들의 바람을 실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얼마 전 사법살인으로 결론이 난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애썼는데

1974년 당시 명동성당을 찾아온 인혁당 재건위 사건 구속자 가족들 중 결국 사형을 당한 고 우홍선 선생의 부인 강순희씨가 울분을 토했다. 육군 대위로 복무한 남편이 공산주의자일 수가 없다며 정부가 조작해서 공산주의자라고 하는데 만일 그렇다면 광화문네거리에서 공개처형해도 좋다고 했다. 다만 조건이 있다고 했다. 공개재판이다. 공개재판을 통해 확인만 된다면 수긍하겠다고 했다.

민주사회에서 공개재판은 너무 당연한 것인데 당시는 군사 비밀재판이었다. 가족 방청도 제한했다. 다른 이는 들어갈 수 없었다. 이들은 형언할 수 없는 고문을 당했다.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벌어지는 현실이었다.


- 두렵지 않았나

두려웠다. 하지만 소명의식으로 이를 극복했다. 혼자라면 두려웠겠지만 침묵 속에서도 국민들이 함께 해주었고 미사에 오시고 동의해주셨다. 당시 가족들의 호소를 들으며 너무 마음이 아팠다. 법정 조서도 조작됐다. “이 사람을 만났나”, “이 일 했는가?” 라는 물음에 이 분들이 “아닙니다” 하고 부인했다. 그런데 기록은 “예” 하고 시인한 것으로 돼 있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었다.


- 70년대는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으로 막을 내렸다

박정희 대통령을 사살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이야기를 하고 싶다. 김재규에 대한 평가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분명한 사실은 그가 만일 모순의 현실을 외면하고 침묵했다면 본인도 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79년 10월 당시 부산 마산의 시민 항쟁 현장을 목격하고 민심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박 대통령과 차지철 당시 경호실장은 “캄보디아에서는 200만~300만 명을 죽였다. 4·19 때는 곽영주 총경이 발포명령을 해 처벌당했지만 이젠 대통령인 내가 명령하는데 누가 감히 나를 어쩌겠는가”라고 응답했다. 이 말에 그는 너무나 놀랐다. 그는 수 백만명의 사람을 구하기 위해 유신의 핵을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이와 같이 자기 온 몸을 던져 민중을 살린 사람이 김재규 부장이다. 이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현실을 늘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


-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조작은폐를 담은 메모를 전달하는 순간 느낌은

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한 해 전에 권인숙양 성고문 사건이 있었다. 군부독재는 ‘학생이 성을 혁명의 도구로 사용한다’고 발표했다. 성고문의 주범인 공권력이 오히려 진실을 은폐하고 날조했으니 이중 삼중의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85년부터 천주교 서울교구 홍보국에서 일하고 있던 나는 당시 발행하던 서울주보에 이런 일을 다 공개했다. 신문들이 일체 보도하지 못하던 때였다. 당시 서울 주보는 매주 25만부를 발행하고 있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도 같다.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며 형식적으로 2명을 구속했다. 그렇게 지날 뻔 했는데 그해 수배를 피해 다니던 김정남(문민정부 교육문화수석)씨가 사제단에 연락했다. 구속돼 있던 이부영씨가 박군 고문치사사건은 조작 은폐됐다고 메모를 전했는데, 사제단이 꼭 공표하면 좋겠다고.

두렵기도 하고 망설여졌다. 또 다시 구속되면 어떻게 되나. 여러 가지 고민과 함께 착잡했지만 자료를 모아 준비했고, 돌아가신 유현석, 황인철 두 분 변호사에게 자문을 구하고 조심스럽게 김수환 추기경께도 설명드렸다.

그러던 차, 김정남씨가 면책특권이 있는 신민당 국회의원을 통해 국회에서 발표할 것이라고 해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여의치 않다는 소식을 또 전해왔다. 이에 고영구 변호사 부인이 가져온 편지를 갖고 김승훈 신부를 찾아갔다. 신부님이 아주 기쁘게 “내가 십자가를 지겠다”고 해서 5월 광주항쟁 7주년 미사 때 발표했다.

처음 발표했을 땐 기자들도 별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아니면 외면했던지. 3일 뒤 동아일보에서 다섯 줄인가 언급했는데, 아 이제 됐구나 하는 확신을 가졌다.


- 쪽지를 전달한 교도관들과 인연은 있었나

한재동씨는 이미 76년 내가 서울구치소에 있을 때 만났다. 한재동씨나 전병용씨 등 우리에게 애정을 가진 교도관들은 “용기를 내라”며 우리를 위로하고 북돋아 주곤 했다. 신약성서 사도행전에는 감옥에 갇혀 있던 사도들을 천사들이 와서 도와주었다는 얘기가 있는데, 그런 교도관들이 바로 하느님이 보낸 천사라고 생각한다. 익명의 많은 사람들, 그런 분들이 민주화 공로자다.


- 박종철 고문치사 규탄과 호헌철폐를 슬로건으로 걸고 6월항쟁이 시작됐다. 학생들이 명동성당에 몰려 들어와 농성을 시작했을 때 당혹스럽지 않았나


당황했다. 10일 저녁 9시가 지난 뒤 1만명 정도의 인파가 시위대 등과 얽혔다. 성당에 빈틈이 없을 정도였다. 그래도 계속 사람들이 들어왔다. 우리가 대화하고 통제할 수 있는 선을 넘어섰다. 시위대의 대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첫날 지나면서 대오가 형성되고 시민대표와 학생대표들로 지도부가 형성돼 그들과 대화하면서 일을 처리했다. 일단 그 분들이 다치지 않도록 노력한다는 게 기본이었다.

11일 밤 11시30분에서 12시쯤 당시 안전기획부 이상연 차장이 김수환 추기경을 찾아왔다. 이 차장이 모든 농성자를 성당에서 내보내야 한다고 했고, “학생들이 다치고 법적 불이익을 당할텐데 어떻게 내보낼 수 있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추기경은 대답했다. 이 차장은 “그러면 경찰이 성당에 진입할 수밖에 없다”며 위협적으로 말했다. 추기경은 고민 끝에 “공권력이 들어오는 일이 있어선 안된다”며 “만일 경찰이 성당에 진입하면 내가 맨 앞에 가서 저지하겠다. 나를 밟고 지나가라”고 선언했다. 이 차장은 당황했다. 이 문제는 대화를 통해 해결해야 함을 추기경은 강조했고 이에 성당측 대표로 김병도 신부와 함께 내가 보좌하기로 했다.

그때 당시는 매일 24시간이 긴박한 상황이었다. 첫째 둘째 날은 밤에 이른바 백골단이 성당 마당에 진입하기도 했다. 첫째 날은 시민 학생들이 화염병을 가득 만들어 교리실에 배치해두기도 했다. 경찰 진압이 곧 시작된다는 말이 수시로 떠돌던, 일촉즉발의 전쟁터 같은 상황이었다.


- 교인들은 불편해 하지 않았나

당시는 다수가 민주와 자유를 바랬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이의제기하는 분은 없었다. 민주화 자유화에 대한 열망이 우리 마음속에 가득 찼다. 농성 닷새째인 14일은 주일이었는데 미사참예 온 신자들이 농성자들 성금통에 돈을 많이 봉헌했다. 성당에 헌금은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모두 기뻐했다.

계성여고 학생들은 학교에 가다 성당을 지나며 도시락을 주었고 남대문상인들은 옷이며 성금을 가져왔다. 넥타이부대가 성원했다. 이런 전체의 힘에 감동받고 힘을 얻었다. 시대의 열망이었던 것 같다. 이와 같이 6월항쟁은 모든 이가 주인공이다. 익명의 모든 무수한 청년학생 시민들의 열기로 이룩한 승리다.

명동성당 농성을 지속할지 해산할지 논쟁도 치열했는데 나는 농성자들의 뜻이 충분히 확인됐으니 각자 자기 자리에서 이 일을 계속하자고 호소했다. 당시 전두환 정부도 올림픽 준비, 국제적인 상황, 해외언론의 관심 등을 고려해 농성자의 안전귀가를 보장했다. 그런 상황에서 해산이 이뤄졌다.


- 6월항쟁 후 20년이 흐르는 동안 명동성당은 어떻게 변했나

교회와 시대는 같이 맞물려 움직인다. 80년대 중반까지는 자유 평화 민주인권을 열망하던 국민의 열기가 성당 안으로 이입됐고 그것을 껴안고 소임을 다했다. 그 후 시민사회단체가 많이 생기고, 각계각층의 요구도 다양하게 분출됐다. 성당이 아니어도 소외된 사람들이 호소할 곳이 많이 펼쳐져 있다.

본의든 아니든 성당이 방어적이고 보수화된 측면도 있다. 교회지도자들의 무의식도 원인일 수 있고 양김씨 분열에 대한 실망도 원인일 것이다. 87년 대통령 선거 때 사제들이 개인적으로 김대중 후보를 지지한 게 사제단이 지지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바티칸의 견제가 들어오기도 했다. 당시 정부측의 외교통로를 통한 거짓정보가 전달돼 일어난 일이다.


- 한국 사회의 새로운 도약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6월항쟁의 결과 전두환 정권이 항복했지만 양김씨 분열로 결실을 맺지 못했다. 아픔이 컸다. 6월항쟁은 엄청난 성과가 있었지만 양김 분열로 노태우 정권이 들어서면서 과거 청산이 안됐다. 해방 후 일제잔재가 청산 안 된 것에 비견할 만하다. 그러나 그것도 우리의 공동책임이 아니었을까. 민주세력의 분화 분열로 역사에 환멸을 준 것 같다. 결국 우리시대 우리 모두의 한계라고 겸허하게 고백하고 싶다.

숱하게 스러져간 이름 없는 사람들의 고난 속에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자유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 희생하고 헌신하며 목숨 뺏기고 감옥간 이들에 대한 감사와 역사적인 보답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는 그 사실을 잊고 있다.

노동조합이든 검찰이든 정치권이든 각계의 자정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것 없이 누리는 자유는 때때로 무책임하고, 권한을 남용하는 것이기도 하다. 민주화운동 했던 이들이 정권에 있지만 민주화를 열망했던 국민을 모두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 그 중 일부다. 더 많은 사람들이 살아있다. 이 분들의 뜻을 모아 재현하는 것이 민주항쟁 20주년 과업이다.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어떤 일을 할 것인가

6월까지 1차 사업을 마무리하고 7월부터는 노동자 권익 보호를 위한 일에 함께 할 것이다. 노동조합은 임금투쟁을 넘어 사회공동체를 위한, 민주사회 정착을 위한, 보다 큰 일을 하면 좋겠다. 모두를 위해 개인을 희생했던 70~80년대 체험을 공유하면 좋겠다.

소외계층과 어려운 여건에 있는 분들도 역사의식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가난과 어려움에 처해 있다는 그 자체가 역사의식을 고취하지는 못한다. 바른 역사의식을 갖고 변천하기 위해선 건강한 민주평화개혁세력과 함께 창조적 미래를 지향해야 한다. 어느 사회에나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은 있다. 그러한 가운데에서도 깨어있는 역사의식과 이기심을 극복한, 공동체를 위한 희생과 헌신의 삶은 더욱 크고 아름다운 것을 이루게 마련이다.



유월에
어디서 나온 기사인가요? 신부님이 참 잘 나오셨네요.... 2007-06-17
23:14:31



           

 [함세웅 인터뷰] 6월항쟁, 일부 정치인 아닌 이름없는 국민의 승리 [1]    2007-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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