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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 함세웅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인터뷰 전문
   한겨레펌   2010-09-17 08:59:27 , 조회 : 3,380 , 추천 : 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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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세웅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인터뷰 전문

                                                  




- 전종훈 신부의 안식년 이야기를 먼저 시작해야할 것 같습니다. 전 신부의 안식년이 삼성문제에 목소리를 낸 신부에 대한 징계라는 평가가 있고, 게다가 매우 무리한 안식년 인사라는 평도 있습니다.

= 교구 행정이 지혜롭지 못한 처사라고 생각합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전신부의 안식년을 징계로 인식하고 있다면 교구의 한 사제로서 부끄럽고 슬프게 생각합니다. 사목의 핵심인 봉사의 가치를 놓친 채 지배 논리를 앞세운 결정이기에 다소 유아적 조처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안식년은 쉬면서 재충전하는 기간인데, 일반 대중이 징계라고 생각할 정도로 인사권을 남용한 것은 좀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교회 공동체가 예언자적 소명을 상실한, 근본적으로 종교적인 철학의 차이에서 나온 조처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마태오 복음 6장에 나오는 하느님이냐? ‘재물’이냐? (하느님이냐? 맘몬(황금신)이냐?) 라는 물음 앞에서 신관의 근본적인 차이를 이 기회에 깊게 생각해야 한다고 봅니다.


- 전 신부의 징계는 신부들의 사회참여를 막으려는 건가요? 한국사회의 가톨릭이 신부들의 사회참여를 부정적으로 보는 게 아닙니까.

= 글쎄 그게 저희 모두의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추기경, 주교, 사제, 수도자, 신자 등 누구든지 만일 권력과 금권 등 탐욕에 젖어 있다면 우선적으로 큰 잘못이고, 그것이 회개의 일차적 대상입니다. 회개를 망각한다면 제도든 사람이든 타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올해는 안중근의사 순국 100주년을 맞는 해입니다. 당시 안 의사를 배척한 우리 한국 교회 당대의 주교 또는 사제는 시대 고민을 망각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우리 가톨릭의 가장 큰 부끄러움으로, 올해 새삼 다시 되새겨야 하는 건 아닌가 생각합니다. 안중근 의사는 자신의 전 존재를 걸고 민족 공동체를 위해 투신했습니다. 그 당대 주교와 사제는 폐쇄적 교회관으로 안 의사를 배척했고 바로 그러한 과거의 폐쇄적 교회관과 조처가 오늘 또 다시 후대에 교직자들에 의해서 반복된다는 것 참으로 부끄럽고 애석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근본적 존재 의미, 구원의 핵심, 성경의 사회적 구원 이라는 본질을 교직자들이 깨달았으면 하는 마음을 지닙니다.

 
- 사실상 전 신부가 아닌 사제단에 대한 징계로 읽어야하는 거 아닙니까.

= 그 부분은 힘들지만, 우리가 기쁘게 껴안고 녹여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많은 분들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자체가 저희들에게 아픔인데, 이 시대의 교회 공동체의 한계, 사목자들의 한계, 저희들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면서 있는 현실 그대로를 수렴하는 게 그리스도인에 대한 소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배제 논리나 갈등의 논리로 해석하기 보다는 우리의 적나라한 모습으로 받아들입니다. 그 속에서 뜻밖의 아름다운 열매, 아름다운 정의의 꽃이 핀다는 희망을 늘 확인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때로 고통을 통해 더 큰 일을 이루시며 권력을 남용하는 자를 꾸짖고 계십니다.


- 좀 더 쉽게 풀어서 설명해 주신다면요?

= 사제 신앙의 근본 대상은 하느님입니다. 때로는 교구장의 존재와 교구장 결정을 넘어서서 살아가야 할 비약의 과정이 있습니다. 신앙인의 삶이 비약의 방법입니다. 그 방법이 성숙한 응답이라고 생각합니다. 프랑스 출신의 성녀 소화 데레사는 만 24세에 숨진 수도자 인데 이 분은 원장과 수련장의 눈치를 보게 되는 자신의 약점을 직시하고 눈에 보이는 장상의 눈치를 보지 않고 모든 것을 투시하고 계신 하느님이 원장이시고 예수님이 수련장이란 신념으로 산 영성가 입니다. 때문에 신앙인은 현실의 제도적 한계를 넘어서야 합니다. 황 기자를 괴롭히는 팀장이 있다고 칩시다. 그것 때문에 한겨레를 떠날 수는 없지요. 부족한 팀장을 넘어서야 하는 겁니다. 우린 그걸 박해받는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십인십색이지요. 곧 다양성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양성 안에서 진리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하고 보편적 가치, 일치성을 추구해야합니다. 어쨌든 장애물이 있다는 것은 고통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극복하고 그에 도전해야 합니다. 이 도전의 가치 때문에 우리는 더욱 생동감을 느끼고 존재의미를 깊이 확인합니다.


- 가톨릭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여쭙겠습니다. 제2바티칸 공의회 이후로 가톨릭은 약자의 권리를 옹호하고 현실에 참여하는 쪽으로 돌아섰습니다. 그 영향이 민주화운동을 한 지학순 주교나 김수환 추기경 등에게 까지 연결된 것이고요. 헌데 지금 한국사회의 가톨릭은 그와 동떨어져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 그런 평가를 겸허하게 받아들입니다. 교회 공동체 여정이나 개인의 여정은 등산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등산길은 기본적으로 올라가다가 내려갔다가를 반복합니다. 지금 교회 공동체는 내리막을 걷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100년 200년의 역사과정을 보면, 진리를 추구하는 인류 모두의 평등평화 실현을 추구하는 가톨릭은 기본적으로 상승의 길로 나아간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오름과 내림이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 어쩔 수 없이 하느님의 역사가 사람에 의해 이뤄지기 때문에 다소 역사 의식을 가진 분이 계시면 상생과 상승의 길을 가고, 역사의식과 현실의식이 부족한 사람이 사목 책임을 맡으면 내려가는 겁니다. 지금의 현실은 하느님 역사의 긴 여정에서 봤을 때 한 점에 불과합니다.


- 정진석 추기경의 영향이 큰 것입니까? 

= 공동체적 관점에서 접근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그분도 교회공동체의 한 구성원일 뿐입니다.


- 한국 사회에서 가톨릭이 존경을 받기까지 가장 큰 역할을 한 게 천주교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그 전까지 가톨릭은 민족적으로 한국사회에 기여한 바가 거의 없습니다. 3·1운동 때도 유일하게 참여하지 않은 종교가 가톨릭입니다. 그런데 지금 정신석 추기경이 사제단을 너무 백안시 하는 거 아닙니까. 사제단 30주면 기념식에 명동성당도 빌려주지 않았습니다.

= 사제단에 대해서 그렇게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에 대해 저희들은 감사하고, 저희들의 신원 의식을 깊이 생각하는 계기가 됩니다. 사제단 안에는 정진석 추기경도 포함됩니다. 궤변으로 들리시겠지만 교회공동체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고 고백하는 신비체이기에 연대적 관점에서 보시기 바랍니다. 정진석 추기경과 사제단을 분리해서 생각하지 말고, 어떤 분은 좀 다르게 생각하고, 우리는 좀 더 적극적으로 생각한다는 차이로 생각해주기 바랍니다. 배 앞에 있냐 배 뒤에 있냐 배 가운데 있냐 그 차이입니다. 교회 공동체를 갈등적 관점에서 보지 않고 포괄적으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핵심은 예수님에 대한 체험, 하느님 체험입니다. 예수님은 2천년전에 종교지도자들과 정치인들로부터 배척당하고 “타살당하신 분”입니다. 이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십자가에 타살당한 예수님의 모상. 그 모습을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혹시 망각하고 있는 건 아닌지 성찰해야 합니다. 많은 신자들이 영광의 예수, 부활의 예수만 노래합니다. 영광과 부활을 노래하기 전에, 예수님은 그 당대 종교 지도자, 정치 권력가에 의해서 타살당한 청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타살당한 청년, 예수님에 대한 깊은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이 같은 깊은 체험을 지니고, 이를 현실화하고, 이웃 곧 백성들과 함께하는 삶이 사제단의 삶입니다. 타살당한 예수님의 체험을 망각하고 산다면, 좀 다른 생각을 가질 수 있겠죠. 타살당한 예수님의 기억이 신앙인의 기본 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인은 타살당한 예수님과 같이 몸을 낮춰야 합니다. 사제단, 추기경, 주교 등으로 구별하기 보다는 과연 그리스도인으로써 타살당한 예수님을 깊이 체험하고 있는가 아니면 외면하고 있는가의 여부로 접근했으면 합니다.


-정의구현사제단은 주교가 인정하지 않은 불법단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 아주 좋은 질문입니다. 두 가지 측면에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우선, 일반실정법이나 교회법에는 관습법이라는 게 있습니다. 10년 이상의 관습과 관행은 법적 효력을 가집니다. 사제단은 1974년부터 36년의 역사를 살아왔습니다. 세배 네배의 법적 효력을 지니고 있고, 그 동안에 이미 공인된 겁니다. 새삼 법적 대상만으로 접근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접근입니다.

두번째는 실정법이나 교회법에도 명시돼 있지만, “침묵은 동의”라는 게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주교님들이 이미 사제단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면서 동참했습니다. 사실상의 공인입니다. 따라서 주교회의가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은 교회 공동체의 의미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말입니다. 사제들은 빛과 소금이 되는 증거적 삶을 살고, 세상을 바꾸는 사목적 삶을 살고 때로는 목숨까지 바쳤던 순교자들을 응시하며 결단해왔습니다. 그 삶이 바로 교회적이고 성서적이고 신학적입니다.


- 정진석 추기경의 사목관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 사목이라는 것은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설정, 인간과의 바른 관계 설정을 통해 구원을 지향하는 한 방법입니다. 사목의 방향에서 법적으로 접근하는 방법도 있고, 믿음으로 접근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법적으로 접근하는게 확실하고 쉽지만, 사도 바오로가 로마서에서 지적한대로 구약에서 언급한 율법을 넘어서야 합니다. 법에만 집중하면 법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는 믿음의 자녀들로, 믿음이 법을 넘어서고 있음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법을 넘어선 믿음을 통한 실천의 삶, 이것이 성서구원신학의 핵심입니다.

구원의 의미를 깨달아야 합니다. 법적으로 접근하면, 표면적으로만 접근하게 되는 겁니다. 교구 행정이 너무 제도적, 관료적, 체제 중심적으로 또는 금권지향적으로 접근하기 보다는 정말 인간적 공동체적 하느님 중심적 신앙을 중심으로 아름다운 공동체를 지향했으면 좋겠습니다.

여기서 저는 또스또예쁘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에 나오는 얘기 하나를 말씀드리고 십습니다. 또스또예쁘스키는 종교재판을 통해 교회의 현주소를, 교회의 기원을 되묻고 있습니다.

16세기 스페인의 세빌리아를 찾아온 예수님은 자기 특유의 품성과 미소로 백성들의 벗이 되고 백성들의 요구를 들어주며, 그들의 고통에 함께 하면서 작은 기적을 베풉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예수님을 따르고 환호하며 감사와 찬미의 노래를 부릅니다. 이런 장면을 목격한 90여 세의 종교재판장 추기경은 예수를 붙잡아 투옥시킵니다. 그리고 한밤중에 예수를 찾아가, “예수님, 당신이 지금 이렇게 오셔서 활동하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요? 당신의 교회에 모든 것을 위임하지 않으셨습니까? 따라서 이제는 당신 없이도 교황, 추기경, 주교, 사제 등 교계제도를 통하여 교회가 잘 움직이고 있는데 당신이 불쑥 나타나시면 방해가 됩니다. 자, 제발 빨리 사라지십시오. 그리고 다시는 오지 마십시오” 대충 이런 내용으로 엮어진 이야기 끝에 예수님의 대답을 재촉하는 추기경에게 예수는 뚜벅뚜벅 앞으로 가 그의 볼에 입을 맞출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추기경은 이때 기절할 정도로 깜짝 놀라며 전율을 느낍니다. 침묵의 예수, 침묵의 키스, 이것은 분명 수수께끼며 신비입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예수의 이 입맞춤을 하나의 신비라고 표현했습니다.

또스또예쁘스키의 고발적 문학은 교회가 과연 예수의 가르침과 복음에 얼마나 충실하고 있는지에 대한 물음으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깊은 반성의 자료가 됩니다.


- 추기경의 교구장 정년이 다 되지 않았습니까.

= 사람은 누구나 다 한계가 있습니다. 사회공동체나 교회 공동체에서 정년이라는 제도, 퇴직이라는 제도가 있습니다. 일을 많이 하고 잘했으니 여생을 기쁘게 쉬라는 걸텐데 사제에겐 은퇴라는 것이 없지요. 사제는 죽을 때까지 사제로 살아야 할 사람입니다. 다만 현장의 직분에서 물러날 뿐입니다. 때문에 교회 공동체 규정에서는 만75세를 기준으로 사목 현직에서는 물러나게 돼 있습니다. 교구장도 교회법의 원리를 따라야 합니다. 만 75세가 넘으면 원칙적으로 사임하는 것은 교회 공동체의 아름다운 정신입니다. 누구나 다 따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75세 정년에 사임하는 것이 교회 공동체의 기본 정신입니다. 그걸 따른 다는 건 아름다운 일이고, 그걸 따르지 않는다면 부끄러운 일일 수 있겠습니다.


- 한국은 가톨릭 가운데 순교자를 많이 낸 나라라고 알고 있습니다. 근데, 그게 다 가톨릭 내부의 선교를 위해서지 우리 민족을 위한게 아니었다는 평가도 있고요. 한국 가톨릭이 다시 과거로 회귀하는 거는 거라 보십니까.

=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좀 편협한 해석입니다. 조선왕조가 가톨릭을 박해했던 정치?사회?국제적 이유가 많습니다만 그 중 핵심은 제사거부와 만민평등사상입니다. 제사는 당시 가톨릭이 조상공경의식이라는 한국의 문화전통을 이해하지 못한 탓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성서기도와 함께 제사의식을 다 수용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세례를 통한 만민평등사상은 조선왕조의 처지에서는 무서운 도전내용이지요. 어떻게 왕과 평민, 천민이 평등할 수 있습니까? 때문에 가톨릭의 순교자들을 단순히 선교적 차원에서 목숨을 바쳤다고 해석하는 것은 당대의 정치?사회적 여건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 단견입니다. 순교자들 가운데에는 13살의 유대철(베드로) 소년도 있고 80살이 넘은 노인들도 있습니다.

환경운동가 황대권님은 1984년에 구미유학생간첩단 조작사건으로 구속되어 실의에 빠져 안동교도소에서 갇혀 있던 중 감방벽에 붙어있는 가톨릭 소식신문에 실린 유대철 어린이의 기사를 읽고 정신을 차리고 살아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아니, 어떻게 13살의 소년이 죽음 앞에서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하느님과 신앙 때문에 이렇게 의연하게 죽을 수 있는가? 계속 묵상하면서 희망을 확인한 고백을 공개했습니다.

당시 가톨릭 교우들, 순교자들의 죽음과 그 존재자체는 불의한 권력, 왕권자체에 대한 도전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순교가 지닌 사회변혁적 의미를 이해했으면 합니다. 만민 평등사상, 비록 순교자들의 삶과 죽음이 70년대 활동했던 우리처럼 큰 사회적 사건으로 해석되진 않았다고 하더라도 순교자들의 목숨을 건 결단은 증언적 사건으로 봐야합니다. 70년, 80년 때 우리가 활동할 수 있었던 것도 이를 되새기고 묵상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읽어줬으면 좋겠습니다.


-  한국 교회가 보수화됐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 기본적으로 보수는 아름다운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보전하고 간직하는 것. 그런데 이 보수는 옛것을 지키려는 수구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진정한 보수적 가치를 지닌 사람은 필연적으로 진보적 가치를 지향해야 합니다. 진보와 보수로 접근하기 보다는 사회 인식, 교회 인식에 있어서 사사화 곧 사유화냐? 그리고 공공적 곧 공유화냐? 이렇게 접근하고 싶습니다.

예를 들어 하느님의 계시는 열어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정부 정책도 투명한 공개의 원리가 적용되듯 그 원리에서 예외가 있으면 안됩니다. 하느님 앞에 공개되듯이 자신의 삶과 가진 것을 공개해야함이 선행돼야 할 것 같습니다. 은폐는 죄입니다.

또 하나는 정직과 공정이 한 짝이 돼야한다는 겁니다. 정직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아주 아름다운 일입니다. 공정은 모두가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거기서 탐욕이 발생합니다. 세상이나 교회 공동체에서 가장 큰 문제는 사적으로 접근하는 방법입니다. 이 모든 것이 공유화, 공동체의 것인데, 자기 것으로 생각할 때 문제가 일어납니다. 명동성당이 명동 성당의 것만이 아닙니다. 한국 모든 가톨릭 신자들 그리고 한국인 모두의 성당입니다. 물론 재산권은 명동성당의 것이지만, 그 고유의 정신과 가치는 대한민국 모두의 것입니다. 사유라는 관점으로 접근하면 그것은 탐욕과 육체의 노예입니다. 공유로 생각하면 온 우주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언론인도 마찬가집니다. 조?중?동도 다 사유적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공유적 가치를 가져야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제나 주교들이 성당이나 사목을 자기 개인의 것으로 생각하면 예수님의 정신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 점이 우리 사제들에게 가장 필요한 가치관인데, 때로는 우리가 이 핵심을 놓치고 있습니다. 핵심을 놓치면 껍데기만 남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위선과 가식입니다. 우리가 정진석 추기경을 비판하고 지적하는 것은 바로 이 점 때문입니다.


- 한국 가톨릭의 수뇌부는 너무 권력화 됐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 그런 지적을 들을 때 안타까운데… 저도 프랑스 파리에서 추기경이 노상 카페에서 차를 마시면서 젊은이들과 대화 나누는 장면을 보도를 통해 읽었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셨는데 동경의 시라야나키 추기경이 교통위반을 한 뒤 범칙금을 내기 위해 경찰서에 간다고 하니 옆에 있던 비서 신부가 내게 추기경도 벌받게 됐다고 웃으면서 농담을 하는 거예요. 저는 조심스러운 표정을 지었습니다. 추기경도 경찰서에 출두하는 일본사회의 문화, 그 추기경의 모습에서 저는 가장 아름다운 인간적 모습을 확인하고 저 자신 깊이 반성했습니다. 예수님은 늘 백성과 함께 하셨습니다. 오늘날 가부장적 가치로 교회의 사목자들이 계급적으로 인식되는 점은 꼭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백성들 속에서 봉사자로 있을 때 사제 존재 이유가 있습니다.


- 삼성 비자금 사건 폭로 이후 삼성은 오히려 더 강력해졌습니다.

= 저는 김용철 변호사를 만나면서 삼성에 대한 많은 사안을 들을 때 가슴 아프게도 기업의 엄청난 범죄성을 접하고 이 부분에 대해서 고민을 하게됐습니다. 기업도 사유화의 대상은 아닙니다. 공적가치를 지향해야하는데, 한 집안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은 삼성을 위해서도 바람직한게 아닙니다. 삼성이 세계적 기업으로 잘 되길 바랍니다. 하지만 그게 한 가문에 의해서 사유화되는 부분은 차단시켜야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가문이 삼성을 위해서 봉사해야지, 기업 자체가 가문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은 기업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근원적인 변화가 이뤄져야합니다.

또 삼성의 경영이 죄송한 표현이지만 조직폭력적으로 움직이는데 놀랐습니다. 또 언론에서도 지적을 했지만, 사실 노무현 대통령 시절, 기업에 자율성을 보장해줬는데, 자율성을 보장하기 전에 대기업에 대한 내적 정화, 내적 진단이 선행했어야 합니다. 그게 없이 자율성만 주다보니 기업이 권력화 되어 마음이 아픕니다. 기업도 늘 소비자를 생각하는 그런 마음속에서, 산업적 접근 뿐 아니라 인간, 미래지향적 접근이 필요합니다. 이익이 적고 기업 성장에 시간이 걸리더라도 인간적 접근을 해야 미래지향적인 기업이 될 수 있습니다.


- 2년 10개월이 지났지만 원점으로 돌아왔습니다.

= 그 게 삼성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전체, 권력의 문제인 거 같습니다. 삼성의 내용을 그 당시 검찰만이 조사를 할 수 있고, 많은 자료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치논리상 특검을 설치할 수밖에 없었는데 특검과 조사단들이 조사할 뜻이 없는 거죠. 제대로 조사를 할 수 없었습니다. 청와대 역시 삼성에 예속돼 조사할 뜻이 없었어요. 결국 그걸 이루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사실 혁명적인 방법으로라도 삼성이 새로 태어나고 양심적인 방법으로 태어나길 바랐지만, 조사를 맡았던 사람들에게 그런 뜻이 없었습니다. 우리 국민들 모두의 한계였던 것 같아 겸허하게 인정합니다. 여전히 삼성의 정화를 위해서 애쓰고 있는 분들이 많은데, 그분들과 함께 채찍을 가하는게 우리 시민의 임무라고 생각합니다.


- 연장선 상에서 천주교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이 삼성문제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이야기해달라.

= 우선 김용철 변호사가 자신도 공범자라는 것을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이 공범자보다 더 큰 범죄자가 있거든요. 이 기업의 정화에 대해서 지적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작은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큰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지적할 수 있거든요. 그에게 다소 흠이 있다 하더라도 엄청난 잘못에 대해, 공동체 전체를 위해서 문제를 제기해야겠다고 판단했습니다. 또 새롭게 태어난 자세로 찾아온 김용철 변호사의 인간적인 위기·박해 이 부분도 마땅히 도와줘야겠다고 판단했습니다. 인권의 관점에서 사회 정의적 관점에서 경제 정의적 관점에서 말이죠.

사실 놀라게 된 것은 과장된 표현일 수 있지만, 삼성의 돈을 받지 않은 공직자가 하나도 없을 정도였습니다. 모든 검찰, 권력자는 삼성의 돈을 받지 않은 자가 없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종교적 영역 언론에까지도요. 지금도 그 일이 부분적으로는 계속되고 있다고 생각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관련 인사로부터 교구의 한 재단에도 삼성이 거액의 기부를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또다시 충격을 받았습니다.

비자금을 정당화시켜준 꼴이 됐는데, 그게 우리 정치현실의 현주소입니다. 부끄럽습니다. 언론의 책임도 있습니다.


- 천주교가 정권과 삼성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는지요.

= 너무 공격적 질문입니다. 저희들은 제 생각에 천주교가 삼성의 눈치를 본다던지 정권의 눈치를 보는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부정과 불의를 외면한다던지, 예언자적 소명에 소홀 한다면 그것이 결과론적으로 정부나 불의한 기업에게 면죄부를 주거나 동조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런 삶을 신학적으로는 공범자적인 삶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점을 늘 생각하면서 회개를 기초로 한 예언자적 삶에 충실하도록 거듭거듭 노력하고 있습니다.


- 앞으로 한국 천주교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 예수님의 삶을 재현해야겠죠. 낮은 삶. 하느님도 인간에게 내려오셨고, 예수님도 내려오셨고, 성령께서도 내려오셨습니다. 기본적으로 내려옴의 삶, 내림의 삶, 어려운 사람들, 억울한 사람들, 신체적 정신적으로 상처받고 아픔받는 모든 사람들, 자기 권력을 뺏긴 사람들, 정의를 위해서 핍박받는 사람들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읽고 체험해야 합니다. 그게 참된 구원이고 회개입니다.

▲ 2010-08-17  한겨레 | 황춘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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