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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사의 삶과 교훈
   함세웅   2009-03-29 02:15:49 , 조회 : 3,763 , 추천 : 470

안중근 의사의 삶과 교훈




2009년 10월 26일은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 100주년, 그리고 2010년 3월 26일은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을 맞는 날이다. 이에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는 5년전부터 역사학자들을 중심으로 〈안중근전집발간위원회〉를 구성하여 안중근의사 의거와 순국 100주년을 준비하고 있으며 지난 2008년 10월 24일에는 한국정치학회와 공동으로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안중근의사의 동양평화론"을 주제로 학술대회를 갖기도 했다.

나는 지난 85년부터 성심여자대학교(현재 가톨릭대학교와 통합)에서 〈종교의 사회적 책무〉라는 주제로 20여년간 강의를 했다. 강의를 하면서 학생들로부터 새로운 시각과 신선함도 배우고 또한 학생들을 격려하며 자극하기도 했다. 새 학년마다 3월 26일 안중근의사 순국일을 맞아 나는 〈안중근의사의 삶과 교훈〉을 학생들에게 강의하고 안중근의사의 자서전, 공판기록 등 그와 관련된 책을 읽고 보고서를 제출토록 과제를 주고 이를 1학기 학점에 반영했다. 학생들은 누구나 숙제를 싫어하지만 학점 때문에 내 요구에 마지못해 응했다. 그런데 학생들의 보고서를 읽으면서 나는 큰 보람을 느끼곤 했다. 그 중 큰 공통점은 거의 모든 학생들이 "안의사에 대해서는 어린시절 교과과정을 통해 일본의 침략자 이등박문을 사살한 분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분의 자서전을 읽고는 그분의 투철한 신념, 정의심, 교육열, 사상, 체계적 이론 등을 깨달았고 무엇보다도 우리 민족의 선각자, 스승임을 새삼 알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그렇다. 우리에게 귀감이 되고 길잡이가 되는 숱한 선현들이 계시지만 안중근의사야말로 바로 지금 우리 시대에 우리가 되새기고 길잡이로 모셔야 할 스승이며 귀감이다. 우리는 대한국인(大韓國人)이라는 안의사의 친필과 함께 그의 왼쪽 네 번째 손가락의 잘린 모습이 선명한 손바닥 인장의 글귀를 대하면서 때로는 가슴 뭉클한 감동을 느끼기도 한다. 안의사는 1909년 연추의 김씨댁 여관에서 11명의 동지들과 함께 대한독립의 결의를 다지며 자신의 손가락을 잘랐다. 안의사는 이를 정천동맹(正天同盟)이라 했다. 하늘을 바로 세우고, 하늘 앞에서 바르게 살겠다는 서약이며 봉헌이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1909년 10월 26일에 하얼빈에서 침략자 이등박문을 주살(誅殺)했다. 그리고 만 5개월간 감옥에서 자서전〈안응칠역사〉를 집필한 뒤, 서문, 전감, 현상, 복선, 문답 등 5장으로 구성된 〈동양평화론〉의 서문과 전감은 서술하고 나머지 3개장은 완성하지 못한 채 순국하셨다.

안중근 자서전의 공개과정, 구성과 내용

안중근은 의거 후 중국 여순 감옥에 갇혀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안응칠 역사〉를 기술하였다. 아직 원본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1969년 4월 일본 동경에서 최서면씨가 한 일본인으로부터 입수한 〈안중근 자서전〉이라는 필사본과 1979년 9월 재일동포 김정명(金正明) 교수가 일본 국회도서관 헌정연구실 '7조청미'(七條淸美)문서 중에서 '안응칠역사'와 '동양평화론'의 등사 합본을 발굴함으로써 더욱 명료해졌다.(신성국, 의사 안중근(도마), 지평, 36-37, 1999)
안의사 의거 100주년을 앞두고 현재 고려대 조광 교수가 이 책을 새로 번역중이며 곧 출간할 예정이다.

〈안중근 자서전〉은 한자로 기록된 문서로 한글번역분량은 신국판 70여쪽에 이르지만 해제를 덧붙여야 하기에 그 두 배에 이를 것이다. 안의사는 감옥생활 5개월동안 유언과 같은 이 자서전을 집필했다.

안의사는 자서전에서 출생과 성장과정(1879-1894) 등 15세 때까지의 회상을 서론과 같이 기술하고, 결혼, 동학당(東學党)과의 대결, 갑신정변(1894), 갑오농민전쟁(1895)에 대한 청년시절 체험을 얘기하고 있다. 이어 그는 18세때인 1897년 아버지와 함께 온 가족이 세례 받게 된 경위와 빌렘(J. Wilhelm, 한국명:홍석구) 신부를 도와 황해도 일대에서 선교에 전념하던 일을 증언하면서 특히 하느님 존재 증명방법과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론, 각혼, 생혼, 영혼에 대한 설명, 하느님의 심판, 부활영생 등의 기본적 교리를 천명하고 있다. 이 증언을 통해 우리는 그의 돈독한 신앙과 19세기 말엽의 교리체계를 이해하고 확인할 수 있다.

선교과정에서 안의사는 무엇보다도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빌렘신부와 함께 뮈텔(G.Mutel, 한국명:민효덕)주교를 찾아가 대학설립을 건의하는데, 두 번, 세 번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뮈텔은 "한국인이 만일 학문을 하게 되면 신앙생활에 좋지않을 것이니(不善於信敎) 다시는 이러한 얘기를 꺼내지 마라" 라고 거절했다.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안의사는 뮤텔의 이러한 자세에 의노를 느끼며 마음속으로 "천주교의 진리는 믿을지언정 외국인의 심정은 믿을것이 못된다"하고 그때까지 배우던 프랑스어를 내던졌다고 술회하고 있다. 선교사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며 하느님과의 직거래 관계를 생각하셨던 안의사의 신앙적 직관과 통찰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안의사는 빌렘신부를 도와 선교에 힘쓰면서 동시에 억울한 사람을 돕는데 앞장섰다. 무엇보다도 전 참판 김중환(金仲煥)이 옹진군민 한사람의 돈 5천냥을 빼앗아 간일이 있었는데 이를 찾아주기 위해 서울까지 가서 항의하고 꼭 갚겠다는 약속을 얻어내기도 했다. 또 다른 일은 해주 병영의 위관 곧 오늘의 표현으로는 지방군부대 중대장 격인 한원교(韓元校)가 이경주라는 교우의 아내와 간통하여 결국 아내와 재산까지 빼앗은 횡포에 대해 법정투쟁까지 벌이면서 사건을 해결하려 했으나 결국 한원교가 두 사람의 자객을 시켜 이경주를 살해한 일을 회상하면서 끝내 한원교가 처벌되지 않은 불의한 현실을 개탄하고 있는 내용이다. 청년 안중근의 열정과 정의심을 확인해 주는 대목이다. 안중근의사의 이와 같은 정의감과 불의한 현실적 모순에 대한 그의 고뇌와 갈등을 우리는 또 다른 여러 대목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자서전을 읽을 때마다 우리는 19세기말 당대의 상황과 안중근의사의 인간미를 새롭게 깨닫고 그의 진면목을 대하게 된다.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 되자 안의사는 가족과 함께 이주할 계획으로 상해를 방문했고 어느 날 성당에서 기도하고 나오던 길에 우연하게 르각(Le Gac, 한국명:곽원량) 신부를 만나 깨우침을 얻게 된다. 안의사의 계획을 듣고 르각 신부는 프랑스와 독일의 국경지대인 알자스 지방을 예로 들면서 많은 이들이 그 지역을 떠났기에 다시는 회복할 수 없게 되었다고 설명하면서 만일 조선인 2천만명이 모두 이주계획을 갖고 있다면 나라가 어떻게 되겠느냐 하면서 무엇보다도 ① 교육 ② 사회단체돕기 ③ 공동협심 ④실력양성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안의사는 진남포로 돌아와 돈의학교와 삼흥학교에서 후학을 위해 교사로서 봉사한다.

안중근은 안창호의 국채보상운동에도 함께하고 그 후 독립군에 투신한다. 독립군 시절 일본군인과 상인 등을 포로로 잡아 무장해제한 후 돌려보낸 일화는 유명하다. 엄이섭 등 독립군들은 일본인 포로 2명을 호송하기도 어렵고 번거로우니 제거하자고 주장했으나 안중근은 독립군은 모름지기 스위스 만국공법(萬國公法)을 지켜야 한다면서 이 둘을 석방했다. 이일로 인해 결과적으로 독립군부대는 일본군의 급습을 받고 완전히 파멸되었다. 안의사는 1달반동안 쫓기면서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긴다. 이러한 과정에서 동행했던 2명의 동지들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죽을 고비마다 안의사는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탁하며 기도와 신앙으로 버텼다.

또한 1907년 안의사의 독립운동을 못마땅하게 여기며 독립투쟁을 포기할 때에만 비로소 성사생활을 할 수 있다면서 성사까지 거부했던 원산성당의 브레 사제(Louis Bret, 한국명: 백fb사) 앞에서 당당하게 신앙을 증거하고 끝까지 독립운동을 지속했다. 참으로 성숙한 신앙인의 결단과 자세였다.

프랑스 사제들의 이러한 패쇄적 자세와 인간적 한계를 극복한 안의사는 사실 우리 신앙인 모두의 귀감이 된다.
사제와 주교 때문에 신앙이 흔들리는 많은 형제자매들에게 안의사는 참으로 든든한 신앙의 길잡이이다. 안의사에게 세례를 주고 끝까지 여순 감옥에까지 찾아가 종부성사를 베풀고 미사까지 봉헌해 준 빌렘신부의 고귀한 행업을 우리는 또한 이 기회에 함께 기억한다. 이 때문에 빌렘신부는 뮈텔주교로부터 성무집행정지조치를 받았지만 바티칸에 이의를 제기하여 뮈텔조치를 무효화했다. 그러나 뮈텔과의 불화로 빌렘은 프랑스로 돌아가 안중근을 생각하며 여생을 마쳤다.

역사는 반복이며 미래를 위한 창조적 길잡이라고 했다. 오늘도 안중근과 같은 의인(義人)을 박해하고 괴롭히는 또 다른 뮈텔주교와 브레와 같은 숱한 사제들이 엄존하고 있는 이 교회 현실에 대해 역사는 후대에 과연 무엇이라고 평가할까? 새삼 안의사의 고뇌를 떠올리며 안의사의 믿음과 결단을 깊이 되새긴다. 그리고 창조적 미래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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